오피 | 호주서 자퇴 후 돌아온 18세 소녀가 망치를 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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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hkyci 작성일21-07-10 조회129회 댓글0건본문
2020년 겨울 KBS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출연한 한 소녀가 화제를 모았다. 19살 어린 나이에 아저씨들만 있는 건축 현장에서 목수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건축 일은 그녀가 호주에서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돌연 자퇴하고, 한국에 돌아와 선택한 일이었다.
경량 목조주택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이아진씨의 모습./ KBS ‘인간극장’ 방송화면 캡처
호주에서 그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조금 더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한국에 돌아와 또래와는 다른, 어떻게 보면 위험하기까지 한 길을 선택한 건지 궁금했다. 이제 3년차 목조주택 빌더(Builder)가 된 스무살 이아진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중학교 2학년 때 유학을 떠났어요. 호주 시절부터 건축을 꿈꿨다고 했는데 이유는요?
“호주에서 4년동안 이모와 유학생활을 했어요. 언어도 안 되는 상태로 가 처음에는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점점 친구들을 사귀고, 적응을 해 나가면서 한국에선 경험하기 힘든 것들을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었어요. 그 중에서도 사진, 체육, 요리 등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녹여내 완성하는 ‘예술’이라는 분야에 빠졌어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예술에 대해 고민하던 중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예술이 건축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렇게 건축학과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죠.”
호주 유학시절 이아진씨./ 이아진 인스타그램
자퇴를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요?
“호주에선 정말 자유롭게 지냈어요. 근데 점점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니 호주든 한국이든 스스로 져야할 책임은 똑같다는 걸 깨달았어요. 세상에 나가 당당히 목소리를 낼 자신도 없고 아직 내 목소리를 찾지도 못했던 터라 하루하루가 조급하고 불안했어요. 대학을 가기 위해선 한 가지 전공을 선택해야 하고, 대학에서의 5년을 위해 고등학교에서 남은 2년을 전력질주하며 쓸 자신도 없었어요. 건축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건축이라는 예술 말고도 세상에는 너무 많은 예술이 있었고, 그것들을 경험해 나가면서 가장 나 다운 예술을 찾고 싶었기도 했고요.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사회로 일찍 나와 시작을 해보라는 조언을 받았어요. 많은 고민이 따랐지만 결심 이후로는 망설임 없이 학교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부모님께선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셨지만 제 의견을 존중해주시고 믿어 주셨어요.”
-한국에 돌아와 집을 짓는 현장에 나가보니 어땠나요?
“부모님 모두 제가 건축이 관심이 있는 걸 알고 계셨고, 그래서 아빠가 일하기 시작한 목조주택 현장에 가서 체험을 해보라고 권유해주셨어요. 첫 출근을 한 날은 목조주택의 콘크리트 기초 작업을 시작하는 날이었어요. 2019년 7월쯤이었어요. 너무 떨렸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어요. 눈 앞에 처음 본 공구들이 왔다갔다했고, 타설(콘크리트를 붓는 일)을 하는 날이라 큰 트럭들과 펌프카가 들어오고 나가는 걸 봤던 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움직였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진 못했던 것 같아요. 공구 이름도 잘 몰라 심부름도 쉽지 않았었거든요. 다만 아무것도 없던 땅덩어리 위에서 공간이 태어나는 모습이 정말 벅차게 다가왔어요. 원래는 하루만 가는 것이었는데 제 마음 속에서는 이미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출근을 하고 있었어요. 너무 좋았어요.”
이아진씨./ 이아진 인스타그램
-건축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목수가 되고 싶었던 건가요?
“저는 목수가 아닌 마스터 빌더가 되기 위해 목조주택 빌더 일을 시작했어요. 한국에선 빌더라는 명칭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목수와 빌더를 구분하지 않더라고요. 목수가 나무를 가공하는 사람이라면 빌더는 건축 설계, 시공 등 모든 이론과 실무를 아우르는 사람이에요. 전 다양한 분야를 모두 섭렵하는 마스터가 빌더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목조주택 현장에서 기본을 배워 나가는 중이고요.”
툴벨트를 찬 이아진씨./ MBC ‘아무튼 출근!’ 방송화면 캡처
-작업을 할 때 허리에 차는 툴벨트가 보통 5kg 정도라고 해요. 어떤 것들이 들어있나요?
“툴벨트는 작업을 할 때 바로 꺼내 쓸 수 있도록 다양한 연장을 넣어 차는 벨트예요. 모두 각자 분야에 맞게 세팅을 하죠. 제가 사용하는 툴벨트에는 스피드 스퀘어(삼각자), 줄자, 망치, 연필 등이 들어 있어요. 무게는 7kg 정도예요. 목조주택 현장에서 쓰는 ‘네일건’과 함께 쓸 때는 10kg이 넘어가기도 해요. 툴벨트는 작업도구에 불과하지만 빌더와 목수의 자부심이자 상징이기도 해요.”
-처음에는 무급으로 일을 배웠다고 해요. 후회한 적은 없었나요? 무급이라 아쉬운 점도 있었을 것 같아요.
“1년동안 무급으로 일했어요. 그때의 저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들이 더 많았어요. 현장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배우는 입장이었죠. 부모님께서도 아직은 돈을 받으며 현장에 나갈 단계는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고요. 1년 정도가 지나서야 조금씩 팀의 일원으로서 같이 일을 해 나갈 수 있었고, 그때부터 급여를 받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힘든 것보다는 현장에 하루라도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일부터 혹시나 나오지 말라고 할까봐 전전긍긍했죠." (웃음)
-첫 일당을 받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가요? 첫 일당은 어떻게 썼는지 궁급합니다.
“작년(2020년) 8월쯤부터 일당을 받기 시작했어요. 팀원으로서 인정을 받는구나 싶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했어요. 첫 일당으로는 아빠의 낡은 툴벨트를 큰 맘먹고 가장 좋은 걸로 바꿔드렸어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너무 뿌듯해요.”
여러 지역을 돌며 일하는 일의 특성상 현장에서 먹고, 잘 때가 많다./ KBS ‘인간극장’ 방송화면 캡처
-현장에 따라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일하고 있어요. 경량 목조주택 한 채를 짓는데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가요? 현장이 집과 멀면 숙소 생활을 하나요? 힘들진 않나요?
“전국을 돌며 일해요. 가장 최근에 다녀온 현장은 경북 청도예요. 충주 집에서 3시간 30분 정도 걸려요. 이럴 때는 주로 숙소 생활을 해요. 집 한 채를 다 올리고 마무리 짓는데 보통 세 달 정도가 걸려요. 이것도 정말 빠른 편이에요. 장마 때처럼 날씨가 안 도와줄 때는 더 걸리고요. 제가 지은 집 중에 가장 오랫동안 지은 집은 5개월이 걸렸어요. 숙소 생활을 할 때는 완공 때까지 그 지역에서 숙식을 해요. 중간중간 하루 이틀씩 주기적으로 집으로 가서 쉬기도 하고요. 일을 마치고 오면 피곤해서 불편함을 느낄 새가 별로 없긴 한데 집 밥이 그리울 때는 좀 힘들어요. 식구들과 저녁 먹고 마당에서 수다 떠는 시간이 그립기도 하고요”
현장에서 작업 중인 이아진씨./ 왼쪽부터 이아진 인스타그램, MBC ‘아무튼 출근!’ 방송화면 캡처
-집을 짓는 많은 과정 중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작업은 무엇인가요? 반대로 가장 재밌는 작업은요?
“현장에서는 작은 톱 하나를 쓰더라도 조심해야 하고, 모든 일에 위험이 따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작업은 지붕 작업이에요. 높은 곳에서 집의 가장 중요한 곳을 작업해야 하니까요. 섬세함과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인만큼 오래 걸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지붕에 올라갈 때면 모두들 두 배로 엄격해져요. 가장 즐거운 작업은 골조 작업이에요. 계산대로 조립을 했을 때 집 한 채가 뚝딱 만들어지는 건 아직도 너무 신기해요. 제가 꼭 익히고 싶은 공정이기도 하고요. 반대로 싫어하는 작업은 단열재 작업이에요. 단열재가 유리 섬유로 만들어져서 살에 닿으면 정말 너무 따갑거든요. 샤워를 해도 나오지 않고 피부에 박혀 있어 나올 때까지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파요.”
-야외에서 하는 일이라 겨울에는 춥고 힘들 것 같은데 어떤가요?
“기온이 낮고 바람이 불면 일하기 정말 힘들어요. 영하의 날씨에 바람까지 세차게 부는 날에는 얼굴과 귀가 모두 떨어져 나갈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는 손에 감각이 없어지고 눈에선 눈물까지 떨어졌고요. 그럴 때는 휴식을 해가며 위험하지 않게 작업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퇴근 전까지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닌 것 같아요. 4~6월이 가장 일하기 좋아요. 비고 적게 오고 햇볕도 따뜻하고 바람까지 선선하게 불어 개운하게 하루가 끝나거든요. 여름에도 태닝한다 생각하고 즐겁게 일하는 편이고요.”
작업 중인 이아진씨./ 이아진 인스타그램
-현장에서 가장 크게 혼났던 일은요? 반대로 칭찬받았던 일도 소개해주세요.
“값비싼 인테리어 자재의 사이즈를 잘못 잘라 못쓰게 만들고, 작업도 못하게 만든 일이 가장 크게 혼난 일이었어요. 급한 성격 탓이었죠. 그 이후로는 항상 재단하기 전에 두 번 생각하고, 다시 사이즈를 재더라도 확인하고 자르는 버릇이 생겼어요. 칭찬이라기 보다는 가장 힘이 된 말씀이 기억나요. 팀원분들께 실력이 너무 안 느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하다고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다들 너는 모르겠지만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정말 큰 힘이됐어요.”
-인간극장은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요?
“제 유튜브를 보고 인간극장팀에서 연락을 주셨어요. 인간극장은 단순히 제 이야기만 공유하는 게 아니라 가족의 모든 이야기가 나가는 프로그램이다보니 가족들 모두 쉽게 출연을 결정하지 못했어요. 많이 무서웠어요. 그럼에도 해보자고 결정한 이유는 이미 거짓 없이 내가 성장하는 과정들을 모두 공유하며 세상과 소통하기로 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다 보여주자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왼쪽부터 한복을 입은 이아진씨, 한복패션쇼에 나선 이아진씨./ 이아진 인스타그램
-지난해 한복패션쇼에도 나갔어요.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복과 잘 어울리는 모델을 뽑는다는 글을 보고 지원했어요.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3일 정도 망설였지만 못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도전이라도 해보는게 좋을 것 같았어요. 첫 시도에선 본선에서 떨어졌는데, 두 번째 시도에선 결선까지 진출했어요. 장려상을 받는데 그쳤지만 후회는 없어요. 최선을 다해 연습했고 열심히 무대에서 놀다왔거든요.”
Mnet 프로그램 ‘너의 목소리가 보여’에 출연한 이아진씨./ Mnet 프로그램 ‘너의 목소리가 보여’ 방송화면 캡처
-너목보(너의 목소리가 보여), 아무튼 출근 등 예능에도 출연했어요.
“섭외가 들어와 출연했어요.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노래 부르고 춤추는 걸 좋아해 개인방송을 할 때 팬들에게 노래를 자주 해줬었거든요. 엄청 싫어하셨지만요. (웃음) 팬분들이 항상 ‘너는 너목보에 나가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 말도 안되게 섭외요청이 들어왔고, 몰래 나갔다 와서 이 사실을 선물로 줘야겠다는 마음에 출연했어요. 아무튼 출근은 건설업에 대한 편견을 줄이고 싶었고, 더 어린 친구들이 꿀 수 있는 꿈을 더 넓혀주고 싶어 출연했어요. 한국에선 또래 친구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빌더로 일한다고 말했을 때 응원보다는 조금은 안타깝고, 낮게 보더라고요. 그게 항상 너무 속상했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나갔어요.”
이아진씨./ 왼쪽부터 이아진 인스타그램, MBC ‘아무튼 출근!’ 방송화면 캡처
-한창 학교에 다닐 시기에 공구를 들고 현장에 나섰어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친구들이 부럽진 않나요? 반대로 친구들 입장에선 하고 싶은 일을 빨리 찾아 자리를 잡아가는 아진씨가 부러울 것 같기도 하고요. 친구들 반응은 어떤가요?
“처음 사회로 나왔을 땐 신세한탄을 많이 하기도 했어요. 친구들과 놀러 다니면서 쇼핑도 하고, 예쁜 카페도 가고 싶은데 일을 해야 하니 자제를 해야 할 때가 많았거든요. ‘나도 저기 있었으면 행복하지 않았을까’하는 감정도 많이 들었고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것들을 많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부러운 건 부러운 거지만 저도 저만의 방식대로 제 길을 가고 있으니까요. 제 친구들은 주로 호주 친구들이에요. 유학 이후로 한국에서 알고지낸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거든요. 호주에선 빌더가 항상 장래희망 1순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 많고 선망 받는 직업이라, 제 친구들은 제가 빌더로 일하는 게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멋있다고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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